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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세웠다

미주 한인이 모교에 제작비를 전액 기부해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세웠다.   영남대학교(총장 최외출)는 개교 77주년을 맞은 지난 22일 학교 설립자인 박 전 대통령 동상 제막식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 동상은 이 학교 건축과 73학번인 이돈(단 리) 액티브 USA 회장의 기부로 만들어졌다.   학교측에 따르면 동상 제막식은 전직 대통령이 아니라 설립자로서의 박 전 대통령의 정신과 교육 철학,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67년 ‘대한민국 발전을 이루기 위해 민족중흥의 동량, 시대적 혁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교육철학과 애국·애민 정신으로 영남대학교를 설립했다.   제막식에는 최외출 영남대 총장, 한재숙 학교법인 영남학원 이사장, 이돈 회장과 배우자 유복경 여사,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 비서실장을 역임한 김기춘 실장 등 200여 명의 내외빈이 참석했다.   동상은 가로·세로 2m, 높이 0.3m의 화강석 좌대 위에 높이 2.5m, 가로·세로 0.8m로 재질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제작자는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과 호암미술관 소장 ‘오수’ 등을 만든 김영원 작가가 맡았다.   동상 제작은 지난해 10월 LA에서 개최된 제9회 영남대 미주총연합동창회 정기총회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이돈 회장이 영남대를 찾아 최외출 총장과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하며 본격화됐다.   이 회장은 이날 축사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을 모교 교정에 세우는 일에 보탬이 될 수 있어서 기쁘고 영광스럽다”며 "영남대 미주총연합동창회 동문들은 대한민국을 7대 경제 강국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을 만들어 준 박정희 대통령의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천마의 기상이 우뚝 선 영남대 캠퍼스에 자랑스러운 설립자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는 일은 북미주에 있는 영남대 미주총연합동창회 동문들의 염원”이라고 덧붙였다.   이 회장은 2011년 7월 돌아가신 선친과 모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2012년 모교 영남대학교에 장학기금을 기탁해 월산장학회를 만들어 후배들을 지원해 오고 있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영남대에 기탁한 장학기금은 400만 달러에 달한다. 영남대에서 운영 중인 개인 명의의 장학회로는 최대 규모다.   최외출 총장은 “최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가 ‘박정희 발전 모델’이 다른 나라들의 경제 발전 정책에 큰 영감을 준다고 찬사를 보낸 것은 우리에게 큰 자랑”이라며 “영남대가 중 ‘어둠과 거짓 물리치려고, 밝음과 참됨 가르치시네’라는 구절과 같이 영남대는 진리와 정의를 가르치는 교육 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윤재 기자LA 한인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영남대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 대통령 동상 영남대 미주총연합동창회 단 리

2024-10-23

[열린광장] 10월을 노래한다

나팔꽃처럼 아름다운 9월이 지나가고 관상용 급송화가 피는 10월이 찾아왔다. 10월을 뜻하는 영어 ‘옥토버(October)’는 라틴어로 여덟 번째를 의미한다. 로마 황제 율리우스 시저가 10개월로 나눴던 1년을 12개월로 바꾸면서 8번째 달이었던 옥토버가 열 번째 달이 된 것이다. 이는 수학에서 8각형을 옥타콘(octagon), 음악의 8도 음정을 옥타브(octave)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0월은 매우 특이한 달이다. 10월엔 미국 대통령이 6명이나 태어났고, 백악관의 초석이 놓인 달이며, 미국을 발견한 콜럼버스 기념일도 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의 39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가 1924년 10월 첫날에 태어났다. 이에 앞서 1735년 10월 30일에는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1822년 10월 2일에는 19대 루터퍼드헤이스, 1829년 10월 5일엔 21대 체스터 아터, 1858년 10월 27일에는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태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890년 10월14일은제 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들이 출생한 날이다. 반면 한국의 대통령과 관련 10월은 비극적인 달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의 총탄에 숨진 10·26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 하나는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을 대표하는 백악관의 초석이 1792년 10월 13일 놓였다는 것이다. 초석의 길이는 175피트, 높이는 85피트에 달한다. 그리고 탐험가 콜럼버스가 미국 대륙에  도착한 것이 1492년 10월12일이다.     10월은 한국에도 기쁜 날이 많다. 1일은 국군의 날이고, 3일은 개천절, 그리고 9일은 한글날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10월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유명인이 출생하고 다양한 일들이 벌어진 달이다. 1813년 10월 10일에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쥬세퍼 배르디가 태어났고, 1859년 10월 20일엔 미국의 철학자 존 드위가 출생했다. 또 1881년 10월 25일엔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1885년 10월11일엔 프랑스의 노밸상 수상자 프랑수아 모리악이, 1888년 10월16일은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유진 오닐이 태어났다.   그리고 미국에서 10월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1867년 10월18일은 알래스카에서 미국 국기가 공식으로 게양된 날이다.  둘째, 1879년 10월19일엔 토머스 에디슨이 세계 최초로 전구 실험에 성공했다. 셋째, 1886년 10월 28일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이 설치됐다.     1517년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교회의 정문에 그 유명한 95개 조의 격문을 붙인 날이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증경회장열린광장 노래 대통령 시어도어 박정희 대통령 노벨상 수상자

2023-10-01

[기고] 이승만·박정희·맥아더 동상 세우자

재외동포위원회 초청으로 LA를 방문하는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와 그 일행을 환영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구국의 영웅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자유 민주주의를 법제화한 이승만 건국 대통령, 산업화를 통해 부국강병의 길을 연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복구되고 국가의 창성을 내다본다.     지난달 출범한 재외동포청은 미국을 비롯한 해외 한인들에게는 ‘희망청’이 되고 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실천 의지, 그리고 윤 대통령과 호흡이 잘 맞는 김 대표의 열정적인 소통의 리더십이 만든 결과다. 이번 김 대표의 LA방문은 동포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국운 상승에도 시너지가 될 것으로 믿는다.     미주 한인들도 세계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윤석열 정부와 함께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당면 과제인 한미동맹의 강화,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 인재들의 창의적 활용, 괴담을 만들어내는 부도덕한  세력의 척결, 그리고 우리의 소원인 멸공 통일도 기대한다.     역사의 새 에너지를 위해서는 새로운 리더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위기의 한국을 구해준 맥아더 장군, 자유 민주국가의 토대를 닦은 이승만 건국 대통령, 산업화의 활로를 찾게 한 박정희 대통령을 기리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남가주에 이들 세 분의 동상을 세우는 일이다.     세 분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미주 한인들에게는 자긍심을, 그리고 혈맹인 미국에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자유 대한민국 번영의 기초를 닦은 이들의 정신을 기리는 것은 미래를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다행히 우리의 뜻에 공감해 벌써 지원 의사를 밝힌 독지가와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과학기술과 문화적 발달, 그리고 신앙의 리더십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역사가 토인비의 말대로 세 분은 창조적 소수자, 한국 역사의 남은자(Remnant)로서 그 정신을 유산으로 남기고 있다.     세 분의 동상을 세워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한인 거주지역의 발전을 위해서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Korean War Memorial)가 있는 풀러턴 공원에 세 분의 동상을 세운다면 많은 미국인의 주목도 받는 명소가 될 것이다. 이 지역은 남가주 한인사회의 중심 지역으로 변하고 있는 곳이다. 또 10월 초에는 오렌지카운티에서 세계한상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둘째, 한인 후세들에게도 맥아더 장군, 이 대통령, 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전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셋째, 한국박물관도 함께 건립하면 금상첨화가 될 수 있다. 이것이 한국 역사·문화 센터가 되는 것이다. 세계의 관심 높은 한국문화, 음식, 역사, 언어, 음악, 영화, 드라마, 선교 등에 대해 소개할 수 있다.     넷째, 한미동맹 강화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세 분의 동상 건립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작업이고, 미국인들과 ‘문화 교류를 통한 소통(inter-cultural communication)’의 기회도 될 수 있다. 또 한인 후세들에 긍지를 심어주고 한국과 부모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 한인 리더들이 배출되고 이를 통해 한미동맹도 더욱 강화될 수 있다.     이미 지난 5월 연방 상원의장과 하원의장에게도 이 역사적 동상 건립 프로젝트를 한미동맹 강화 차원에서 협력해 달라는 협조 요청 서한을 보냈다. 김기현 대표의 LA방문과 함께 앞으로 만들어질 새 역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기쁘다.  김회창 박사 / 박정희정신계승사업회 미주총회장기고 박정희 맥아더 박정희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맥아더 장군

2023-07-12

잔디 깎고 수영장 청소…황손의 이민 10년

이석(83)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아들 의친왕 이강의 11번째 아들이다. 현재 고종의 손자 중 연장자로서 조선왕조 500년 역사와 전통, 문화를 앞장서 알리고 있다. 조선왕조 후손의 삶은 비운의 한반도 역사와 닮았다. 이 이사장은 “영친왕과 이방자 왕비 등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 이젠 (고종의) 손자녀만 남았다”며 “누님인 이해경(94) 옹주는 뉴욕에, 남동생 둘은 LA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다. 열댓 명인 조카들은 각 분야에서 활동하지만 ‘잃어버린 세대’가 됐다”고 슬픔을 드러냈다. 그는 “한국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일 때마다 직계 후손들에게 조선왕조의 뿌리로서 역사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 신세대도 조선의 역사에 관심을 둬 우리가 뿌리 깊은 전통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이석 이사장과 일문일답.     -10년 이민생활 등 미국과 연이 깊습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신군부 헌병이 청와대 옆 칠궁에서 살던 나를 쫓아냈어요. ‘여보쇼 왕손들은 세상을 몰라, 돈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집도 없이 내쫓으면 어떡해?’ 그러니까 총 차고 와서 ‘역사 필요 없다’고 해요. 너무 실망해서 1979년 12월 9일 LA 도착해서 이해경(1956년 미국 이민) 누님, 옹주가 사시는 뉴욕에 갔어요. 그러다가 알래스카 코디악 6개월, LA에서 9년 등 망명 아닌 망명을 했어요.”   -LA 생활은 어땠나요.   “그때 나이가 41세였어요. 하루 16시간 노동을 했습니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면 남의 집 잔디 깎아주고, 점심때 부자 동네 베벌리힐스 수영장 청소하고 빌딩 청소, 수퍼마켓 경비 등 그렇게 해서 돈을 한 10만 달러 벌었어요. 그 돈에 융자받아서 잉글우드에 리커스토어를 차렸습니다. 흑인 강도만 13번을 당했어요. LA폭동(1992년 4·29)때까지 있었으면 (가게 운영하다) 죽었을 거예요. 1989년 이방자 왕비, 고모님인 덕혜 옹주 장례식 때문에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LA를 다시 온 소감은요?   “이번 첫 밤을 LA한인타운 옥스포드 호텔에서 잤어요. 내가 있을 때보다 한인이 더 많고 크게 발전해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껴요.”   -앤드루 이씨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여러 기부에 나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앤드루 이가 태조 이성계 가계의 후손입니다. 2016년 만났는데 앤드루가 굉장히 성공했어요. 내가 조선을 되살릴 힘은 없어요. 앤드루가 아들뻘이니 힘을 좀 받아라. 세습 비슷하게 (왕조 계승) 약속을 했어요. 앤드루보고 (황실 계승 등) 힘을 쓰라고 명령을 했죠.”   -앤드루 이 활동을 어떻게 보는지요.   “여러 가지로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어요. 대한민국(조선왕조) 역사가 사라져가고 있잖아요. 우리 왕조, 우리가 뿌리 깊은 전통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선구자가 있어야 합니다. 선구자가 나서서 역사와 전통을 사라지지 않도록 해결하길 바라요.”   -고종의 마지막 손자라는 무게는 어떤가요?   “나는 고종황제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입니다. 조선왕조 왕자 중 나이가 제일 많아요. 황실 후손 연장자로서 대한민국 통일되는 것도 좀 보고, 정치를 잘하는 대통령이 나와서 역사의식을 갖고 상징적이라도 국민의 정신을 이끌어갈 ‘임금’이 있으면 좋겠어요.”   -조선왕조가 끊겼습니다.   “제일 큰 원인은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초대 대통령 그분이 영친왕 작은 아버님을 모셔왔어야 돼요. 그런데 임금님이 돌아오시면 대통령 인기가 없어진단 말이에요. 그때 국민은 임금님밖에 몰랐어요. 못 오시게 하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모셔왔죠. 그렇게나마 연결됐는데 다 돌아가시고 끝이 나고 저희만 살고 있어요.”   -경험하고 바라본 소회는?   “슬프죠. 좀…역사가 너무 그렇게…거기다 새로운 세대는 역사가 필요 없다고 해요. 잘 가르치지도 않아요. 왕실이 절대 잘못한 건 많이 없어요. 한 왕조가 500년 이상을 지낸 왕조가 없답니다. 1년에 한 번 종묘 제사와 전주에서 한 달에 한 번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한인사회에 강조하고 싶은 말씀은?   “대단히 반갑습니다. LA에 내리자마자 한인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요. 대한민국 국민, 한인 여러분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같은 민족으로 모두가 단합해서 통일도 이루고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의 나라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삽시다.” 관련기사 LA시티칼리지에 세종대왕 동상 세운다 김형재 기자수영장 잔디 조선왕조 후손 황실문화재단 이사장 박정희 대통령

2023-04-11

[기고] 혜안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1867년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헨리 슈어드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러시아령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했다. 당시 여론은 “자원도 없고 온통 얼어붙은 황무지를 뭐 그리 비싼 값에 사는가?”라면서 반대가 많았다. 매입을 주도한 슈어드를 향해 ‘슈어드의 얼음상자(Seward’s icebox)’ ‘북극곰 정원(polar bear garden)’이라고 조롱했다. 당시 알래스카의 주요 수익원이었던 모피의 경우, 러시아인들의 남획으로 19세기 중반 이미 알래스카 해달은 멸종 위기 단계여서 말 그대로 단물이 빠진 상태였다. 그러니 ‘다 빨아먹은 오렌지(sucked orange)’라고 했다. 그러나 알래스카는 지하자원의 보고였다. 금부터 석유까지 별의별 자원이 나왔다. 특히 석탄은 그 매장량이 세계 1위다. 그 뿐만 아니라 전략적, 지정학적으로도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미국이 소련과 냉전으로 대립을 하게 되면서 알래스카는 군사 기지의 요충지로 최전방 기지가 되었다. 윌리엄 슈어드라는 위대한 한 사람이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미국을 군사, 경제 등 모든 분야의 대국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이었음에 틀림없다.   지난 14일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5돌이었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 애국심은 한국을 세계 경제사에서 최단시간에 가장 빨리 성장한 나라로 만드는데 초석이 되었다. 6·25로 폐허가 된 세계 최빈국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도약한 것은, 박 대통령을 빼놓고는 불가사의한 일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까지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 미만의 최빈국이었던 나라가 그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세계화를 이룩하였다는 것은 지도자의 혜안과 각고의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과 비교해도 80년이나 뒤떨어진 나라였다.   박 대통령은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또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고 말하며 ‘오직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뼈아픈 결정을 내리며 탄광근로자와 간호사의 서독파견, 남미 농업이민, 월남파병, 원양어장 개척, 현대건설 해외진출, 한·일 국교 정상화 등 대외 지향적인 국가경영진로를 확정해 나갔다.   1964년 12월 차관교섭 차 독일을 방문한 박 대통령에게 에르하르트 총리는 독일이 프랑스와 화해 협력하는 것처럼 한국도 일본과 협력할 것을 권고하며 “모두가 지난 과거사이니 자기들처럼 한국도 일본과 손잡고 경제발전을 꾀하면 돕겠다”고 진심어린 권고를 했다. 박 대통령은 치욕적인 한·일관계를 감내하며, 한·독정상회담에서 독일이 담보 없이 2억5000만 마르크(당시 약 4770만 달러)를 주기로 하여 최초의 재정차관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한·일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이 건설되어 한국경제 고도성장을 이끈 대표적인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처음부터 야당은 반대했고, 추가 파병에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및 정부 일부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 반대의 큰 이유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사단을 뺀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미국 측과 수차례의 회담을 거쳐 남·북 간 대치에 대응할 수 있는 한국군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 공여 등 14개항의 사전보장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월남파병으로 외화를 획득하여 한국 경제발전과 군사기술 및 군장비 현대화에 기여했다.   경부고속도로도 야당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국민의 생활양식을 바꾸어 놓은 것은 물론 공업발전을 가속화하고 국토의 균형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축적된 경험과 기술력을 통해 건설 산업의 발전을 기할 수 있었다.   박대통령이나 알래스카를 사들인 윌리엄 슈어드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지금도 이런 혜안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지도자 혜안 러시아령 알래스카 박정희 대통령 월남파병 원양어장

2022-11-20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무덤

워싱턴 DC 부근에 가면 마운트버넌이라는 곳이 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저택과 농장이 보존되어 있다. 미국인은 물론 많은 사람이 찾아가는 관광지의 하나이다. 농장 안을 거닐면 안내방송이 들려온다. 워싱턴은 두 차례의 대통령 임기를 끝내고 주변의 간곡한 연임 권고를 거부하고 사저로 돌아와 살았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쓰면 워싱턴은 “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지금 백악관에 계십니다. 이름만 부르기 어색하면 파머(farmer·농부)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은 영국 전통을 따라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 응당 국회의사당 안에 안장될 것으로 여겼다. 그 분위기를 잘 아는 워싱턴은 자기는 내 농장 집, 내가 지정한 장소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지금도 살던 저택 왼쪽 그것도 돌들이 쌓여 있던 경사지에 잠들어 있다. 여러 차례 국회의사당으로 이장할 것을 시도했으나 아직까지 유언에 따라 옮기지 못했다. 보초 군인 두 사람이 교대해서 경호를 서고 있다.   워싱턴 “농부라고 불러주세요”     그가 살아 있을 때 창고 비슷이 사용하던 건물 안에는 그의 애용품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바이블을 얼마나 애독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섬기는 사람이 참다운 지도자라는 아메리카의 정신적 원천을 암시해 준다.   내가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미국의 지도자는 워싱턴보다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그는 워싱턴보다 26년 선배였고 필라델피아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필라델피아 어디에 가든지 그의 삶의 향기와 흔적이 남아있다. 필라델피아라기보다 프랭클린시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그의 무덤을 찾아보고 싶어 찾아다니다가 안내를 받아 발견한 곳은 일반인과 같은 묘소에 누워있는 비 교적 큰 돌비석 무덤이었다.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가이지만 찾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였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으면 초창기 아메리카의 실정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했고 미국 헌법제정에도 참여했다. 대서양을 왕복하면서 영국과 유럽의 문화 사상계와 교류도 많았다. 학문과 정신계의 친구들은 모두 유럽에 있었다. 미국인은 그를 과학자와 발명가로 평가할 정도로 존경하나 정규적인 과학교육은 전무했고 학교교육도 받은 바가 없었을 시대의 사람이다. 지극히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아메리카를 건설했다.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교회와 대학이 설립되었고 정치지도자보다 사회지도자들이 나라를 건설했다. 그 기반에는 기독교의 휴머니즘이 깔려있다. 어떻게 보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니고 반석 위에 세워진 건물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정치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의 부산물이었고, 민주정치는 인간다운 삶의 유물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나는 지금까지 10명의 우리나라 대통령과 함께 지냈다. 그런데 한 번도 어느 대통령의 무덤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물론, 내 편협 된 견해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정치 노선을 굳건히 한 데는 존경심을 갖는다. 그러나 왜 철없는 경무대(현 청와대) 측근들의 장막에 가려 4·19 때 애국심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에게 발포를 허락했는지 애석한 마음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렇다. 국민을 절대빈곤에서 경제건국의 기틀을 만든 공로는 인정하면서도 유신헌법을 만들고, 인권경시의 과오를 범했는지 유감이다.   최근에는 나도 모르고 있던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봉하마을 묘역과 시설이 그렇게 넓은 줄은 몰랐다. 그리고 역대 대통령들이 무궁화대훈장을 셀프 수상했다는 사실이다. 국회에서 생전이나 사후에 증정하는 것으로 알았다. 구소련의 흐루쇼프 수상이 셀프 영웅훈장을 받았고 같은 독재국가에서는 관례가 되어 있다. 김정은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 출신이니까 받고 싶었을 것 같다. 민주주의 국가 원수의 셀프훈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앞으로는 무궁화대훈장을 국민이 드리고 싶은 정치지도자가 많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직과 진실, 인간의 기본 가치   그런데 나는 지금도 도산 안창호의 묘지를 찾아갈 때가 있다. 나만이 하고 싶은 말씀을 드린다. 이장하기 전에는 인촌 김성수의 묘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들은 정치계에 몸담고 살면서도 국민계몽과 교육을 더 소중히 여겼다. 국민 모두의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정치의 목적으로 삼았다. 국민에게 모든 것을 바쳤지 국민과 정치를 통해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나라를 위해 태어났다가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베푸는 생애를 살았다. 개인적으로 대면했을 때도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을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처했다.    정치는 정권과 공존한다. 그 정권욕에 빠지면 국민은 정치의 수단이 된다. 두 사람에게는 정권욕이 없었다. 항상 더 유능한 인재를 찾아 양보하는 모범을 보였다. 명예를 탐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교육과 종교계의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도산과 인촌에게서는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정직과 진실, 공정과 정의, 휴머니즘의 기본가치인 인간애 등은 정치적 사회가치의 기본이다. 그분들은 인격과 더불어 그 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정치 그 자체는 목적이 못 된다.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구현하는 수단과 과정임을 보여 준 지도자들이다. 우리 위해 사시다 가신 지도자 중의 지도자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프랭클린 벤저민 삶의 향기 우리나라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2022-07-11

[삶의 뜨락에서] 조그마한 돌

사람들은 태산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보다는 조그마한 돌에 걸려 넘어져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저의 친구 중에 아주 건강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이 테니스를 치면 코트를 휙휙 날아다니는 것처럼 몸이 빠르고 기운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보고 “아니 인삼으로 깍두기를 담가 먹었나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기지”하고 놀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올해 초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서로 “아니 그렇게 건강하던 그가 어찌 된 것이지”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그가 작년에 넘어져 뇌에 출혈이 생기고는 내리막길을 가게 되고 몸이 빨리 나빠지면서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친구가 자그마한 돌에 걸려 넘어져 세상을 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장인어른도 100세를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100세 생일을 며칠 앞둔 날 은행에서 나오다가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지셔서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는 큰 사고 보다 작은 일로 잘못되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해리도 하마나 사자의 습격으로 죽은 것이 아니고 아프리카 잡목의 가시나무에 다리가 찔리고 염증이 심해져서 세상을 떠납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주인공 파울 바이머도 그 심한 폭격이나 육탄전에도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때에 보초를 서러 나갔다가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납니다. 아주 작은 사고입니다. 그리고 며칠만 지나면 전쟁이 끝나 집으로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속담에 바늘구멍이 둑을 무너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사소한 일이 대사를 망치는 것입니다. 100년을 끌었다는 포에니아 전쟁에 카르타고 성은 견고했습니다. 성안의 군량은 10년을 먹을 것이 있다고 했고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돈 많은 귀족, 아스틸락스가 카르타고 시의 자세한 지도를 로마군에 팔아먹었을 때 난공불락의 카르타고 시는 함락되고 정말 지옥과 같은 참상이 벌어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경호대장인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실은 일개 연대 병력의 수준으로 경호했습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수도경비사령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부의 작은 적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배신이 연대 병력의 경호를 허물어트리고 대통령은 무너졌습니다. BC 44년 3월 15일은 로마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그 많은 전쟁에 이기고 로마의 영토를 넓혀주었던 대장군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을 당한 날입니다. 그 많은 전쟁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시저는 그날 원로원에 나가지 말라는 부인의 청을 물리치고 원로원에 나갑니다. 그리고 카시오스 부르터스 일당의 칼에 맞아 쓰러지고 로마의 역사는 바뀝니다. 그저 그날 원로원에만 안 나갔어도, 자그마한 돌을 조심했어도 로마의 역사, 세계사는 변했을는지 모릅니다.     ‘대야망’이란 소설의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온갖 굴욕을 다 참으면서 일본을 통일하고 대장군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의 초대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식중독으로 대장군의 삶을 마감합니다. 크나큰 전투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큰 것만 바라보고 작은 것을 지나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작은 돌에 걸려 죽을 때가 많은데 그 작은 돌을 보지 않고 저 큰 산이 무너져 나를 덮치지 않을까 하고 염려를 하며 살아갑니다. 알프스산이 내 머리 위로 무너질 염려는 없습니다. 바로 내 발 앞의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용해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대통령 경호실 대장군 줄리어스 박정희 대통령

2022-05-19

[시론] 갈등과 대립의 시대를 넘어…

전두환 전 대통령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욕이 교차한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 가운데 전 대통령만큼 끊임없이 비판받고 마지막 순간까지 논란을 일으킨 경우는 없었다. 전 대통령이 철권통치했던 8년(1980~1988)은 정치적 억압과 권위주의 통치, 인권 탄압 등이 이어졌다. 그는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 기반을 잡은 후 5·18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하며 집권했다. ‘80년의 봄’으로 상징됐던 민주화 바람은 그의 등장으로 싹이 꺾였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많은 시국 사범들이 잡혀가 옥고를 치렀다. 언론에 대해선 보도 통제와 사전 검열이 일상화됐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2차 오일쇼크의 경제 위기를 벗어나 1980년대 유례 없는 호황기를 맞았다. 정치적으로 암울했지만 단군 이래 처음이라는 ‘물가 안정’ 등 경제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긍정적 사실이다.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결단으로 국가적 파국을 피했다. 전 대통령은 직선제 수용이 사실 자신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유혈 사태를 통해 권력을 잡고 폭압 체제로 국민을 억눌렀던 전 대통령은 권력을 순순히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예상했으나 이런 예상을 깨고 평화적 과정으로 권력을 이양해 국가적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때도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많이 저주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로 찾은 민주화의 기회를 짓밟았다며 정치인들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비난하고 막말로 욕하고 저주했다. 지금 여권 인사와 일부 언론이 별세한 전 대통령을 전두환씨라고 호칭하는 것에 대해 “예의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않다.     사회운동가이며 영문학자인 백낙청 교수는 “‘학살자 전두환 사망’ ‘전두환씨 사망’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 별세’까지 시중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악평과 폄하로 표현한다”라며 “선인도 악인도 죽음 앞에서는 말을 삼가야 한다”라고 충고했다.   전두환은 유언에서 북녘 땅이 바라다 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 라고 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김일성 왕조가 무너지고 조국이 통일되는 감격을 맞이하는 일’이 ‘평생 지녀온 염원과 소망’이라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좌우 진영과 지역, 계층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 이 대립과 갈등이 격화된 출발점이 바로 전 대통령 집권 과정이었다. 이 갈등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 격동의 현대사 중심에 서있던 전 대통령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김대중 대통령도 전 대통령에 대해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했다. 이제는 어두웠던 역사의 기억도 그와 함께 떠나보냈으면 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우리 사회도 대립과 갈등, 상처를 넘어서는 길로 가기를 바랄 뿐이다.   전두환의 죽음과 함께 불행했던 한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역대 모든 정부의 공(功)은 끌어 안고 과(過)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악마를 타도하겠다고 악마를 닮아서는 안 될 일이다.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죽음의 강을 넘은 한 인간, 원한의 한을 마감해야 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수석부회장시론 갈등 대립 대통령 직선제 박정희 대통령 전직 대통령들

2021-11-30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지병 앓다 90세 일기로<1931~2021>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사진) 전 대통령이 23일(한국 시간) 사망했다. 향년 90세.     지병을 앓아온 전씨는 이날 오전 8시 40분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화장실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 심폐 정지가 온 것으로 추정된다. 전 전 대통령은 그동안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과 체내 칼슘 수치가 상승하는 고칼슘혈증 등을 앓아왔다. 지난 8월 중순에는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았다.   경찰은 오전 9시 12분께 사망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파악됐다. 시신은 곧 연대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됐다.   한편, 지난달 26일 12·12 군사 쿠데타 동지 관계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데 이어 한 달도 되지 않아 전 전 대통령도 세상을 떠났다.   1931년 1월 23일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전씨는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뒤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고 무인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데 이어 정권 찬탈을 위한 ‘12·12 군사반란’을 획책했다.   군사 반란을 통해 집권한 전씨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했으며 1988년 초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퇴임 후 내란과 살인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관계특집 2·3면〉전두환 대통령 대통령 사망 박정희 대통령 사망 사실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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